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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화
鐵道가 開通될 당시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다. 대체로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開化 文明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鐵道가 開通되기 전에 우리나라에 먼저 들어온 日本人들은 1876年 2月 丙子修好條約 締結이후 虎視耽耽 侵韓策을 展開하여 왔다. 그 중에서도 鐵道ㆍ鑛山등 經濟 利權을 獲得하기 위한 운동은 熾烈하고도 執拗하게 전개하여 왔던 것이다. 鐵道 敷設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測量 事業이었던 것이다. 京釜間을 먼저 測量 하려고 마음 먹은 것은 1880年대였다. 이 時期는 丙子修好條約 締結 이후 5,6年이 經過된 때였으며 우리나라를 中間에 놓고 淸나라와 日本이 서로 먹기 위한 鬪爭을 벌여 그 뒤 壬午軍亂, 甲申政變등 一連의 武力的 鬪爭을 操縱 表面化시켰으나 아무 결정적 得失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이 시기에 歐美 列强들은 政治的 浸透보다는 經濟面에서의 機會 均等을 懇望하고 있어 外國 財閥들이 大擧 西勢東漸적인 進出을 꾀하고 있었다. 그들은 半島의 寶庫를 蹂躪하기 위한 立場에서 近代資本主義國家다운 浸透를 개시해 왔다. 따라서 京仁鐵道 부설권이 美國人에게 넘어가기 以前인 1890년도에 이미 日帝는 서울 釜山間의 用地 測量을 圖謀 하였던 것이다. 京仁 鐵道를 日本人 財閥 澁澤榮一등 17人이 引繼받는 한편 가장 눈독을 드리고 더욱이 장차 韓國을 侵蝕하기 위한 基本 路線이 되는 서울 釜山間의 用地測量은 그네들의 立場에서 보면 상당히 重要한 사업가운데 하나임은 두 말을 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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